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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그리마에 죽음의 기사들이 들어왔다. 언데드 스컬지 군단을 이끌던 리치 왕의 정예 기사들. 그들 중 ‘칠흑의 기사단’이 리치 왕을 배신하고, 그를 물리치는 편에 서기로 한 것이다. 그들 중 일부는 여전히 기사단으로 활동하기로 했지만, 일부는 원래 진영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그리고 그 과정 중에서 생전의 가족과 연락이 닿고, 다시 만나는 경우도 있었다. 


레온은 형이 죽음의 기사가 되어 돌아왔고, 자신을 만나고 싶어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실버문에서 한달음에 오그리마까지 날아왔다. (소꿉친구 마법사가 차원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걱정 반, 기대 반으로 형이 묵고 있다는 숙소를 찾아갔다.


레온은 눈앞에 있는 형이 낯설었다. 분명히 얼굴은 형 리온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가 알던 많은 부분들은 달라져 있었다. 햇살처럼 빛나던 금발은 하얗게 빛바랜 모습으로 생기없이 뻗쳐 있었고, 두 뺨도 푹 꺼져 있었다. 무엇보다도 핏기 하나 없는 피부가, 그리고 섬뜩한 푸른빛으로 빛나는 안광이 그가 생명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생전에 빛을 섬겼던 성기사에게선 순리를 어기고 이 세계에 남아있는 죽은 자의 부정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말... 형이야?”


레온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사실 죽은 줄 알았던 형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기쁨보다는 얼떨떨함이 더 컸었다. 그래도 형을 만나면 기뻐서 어쩔 줄 모르겠지 하고 막연하게 기대했다. 하지만 막상 형을 보니 혼란스럽기만 했다. 정말 내가 알던 형이 맞는 걸까?


“그래.”


짧게 대답하는 목소리마저 죽은 자 특유의, 이 세상이 아닌 곳에서 나오는 듯한 울림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생전의 형은 저렇게 무뚝뚝하지 않았다. 늘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던 형의 모습이 떠오르자, 레온은 고개를 흔들었다. 생전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긴 해도, 어쨌든 형이 돌아온 것은 기쁜 일이라고 생각했다. 레온은 애써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동안 고생 많았지? 이렇게 다시 만나서 정말 기뻐.”


“......”


리온은 말없이 동생을 바라보기만 했다. 차가운 안광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듯 했고, 굳게 다문 입가에서는 어떤 표정도 나타나지 않았다. 


‘정말 기뻐하고 있나?’


리온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리치 왕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자신에게 동생이 있다는 걸 떠올렸을 때, 동생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리움이라던가 애틋함 같은 감정이 든 것은 아니었다. 이미 한 번 죽었다가 다시 일어난, 사악한 리치 왕의 지배 하에 붉은십자군은 물론 일반 시민들까지 무자비하게 학살했던 죽음의 기사가 된 그는, 생전의 기억이 돌아왔다고 감정까지 되살아나지는 않았다. 마치 물에 젖어 지워진 종이의 글자처럼, 희미한 흔적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현재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죽음의 기사들만이 느끼는 파괴 욕구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온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한 건, 그것이 당연한 의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반짝반짝한 동경의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동생,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순수한 성격의 그녀석이 자신이 죽은 줄 알고 있다면, 그래서 조금이라도 슬퍼했다면, 다시 돌아왔음을 알려줘야한다고 생각했다. 일부러 피하거나 숨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이런 반응은 예상 못했는데.’


레온이 자신을 보고 어떻게 반응할 지 기대 같은 건 하지 않았고, 동생과의 만남에서도 별 감정이 생기진 않았지만, 레온의 혼란스러운 표정이 반갑진 않았다.


“형? 형도 뭐라고 말 좀 해 봐.”


어색한 침묵을 깨고 다시 레온이 말을 걸었다. 어떻게든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노력중이었다. 


“...성기사가 됐나 보군.”


리온은 레온의 등에 매고 있는 방패를 흘긋 보며 말했다. 리온이 입을 열자, 레온의 표정이 밝아졌다.


“나 어렸을 때부터 형처럼 성기사가 되는 게 꿈이었잖아. 성기사 훈련도 끝냈고, 이제 정식으로 모험가로서 활동할거야.”


“잘됐네.”


진심으로 기쁘다거나 축하하고 싶은 마음은 안 들었지만, 그렇게 말해야할 것 같아서 나온 대답이었다. 레온도 그것을 느낀 듯 표정이 살짝 굳어졌지만,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다시 밝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형은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이제 자유의 몸이 됐는데, 또 입대할 건 아니지?”


레온의 질문에 리온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에겐 할 일이 있었다. 


“리치 왕은 쓰러뜨려야지.”


“그건 모험가 길드에서도 할 수 있잖아. 요즘엔 많은 길드에서 노스렌드 원정대를 도와줄 지원자들을 보내고 있는 걸. 나도 거기 가려고 준비중이었고.”


“뭐?”


리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냥 아제로스를 여행하면서 사람들을 도우는 게 네가 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나?”


“그랬지. 지금도 그래. 하지만 지금 시국이 그렇잖아. 스컬지의 위협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안전한 아제로스를 만들기 위해 모두 노스렌드 원정을 가고 있는데, 여기 참여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사람들을 도우는 게 아니겠어?”


리온은 왠지 모를 불쾌감을 느꼈다. 하지만 레온은 그 기색을 눈치채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형도 우리 길드에 입단하면 되겠네. 말 나온 김에 신청하러 가자.”


“그래. 그러도록 하지. 그리고 노스렌드에는 내가 가면 되겠군. 넌 빠지고.”


“왜? 같이 가도 되잖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묻는 레온에게 리온은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너같은 애송이랑 같이 가고 싶은 마음 없어.”


“뭐?”


레온은 말문이 막혔다. 그를 바라보는 리온의 입가에 냉소가 떠올랐다.


“잘 못 들었나? 다시 한 번 말해주지. 이제 막 성기사가 된 초짜가 같이 다녀봐야 짐덩이일 뿐이야.” 


“뭐? 짐덩이?”


레온이 벌떡 일어서며 탁자를 쾅! 하고 내리쳤다. 리온은 아무런 동요없이 레온을 바라보았다.


“기껏 이딴 소리나 하려고 돌아온거야?”


씩씩거리는 레온의 얼굴은 그의 머리색만큼이나 붉어져 있었다. 


“그럴지도.”


리온의 무심한 대답에 레온은 더욱 어이가 없었다. 리온은 말을 이었다.


“죽음의 기사들이 얼라이언스와 호드에 합류해서 전력도 보강됐을 테니, 신입 모험가들까지 노스렌드로 갈 필요가 없다는 얘기야. 너같은 건 가봐야….”


“나같은 건 가봐야 뭐!”


레온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리온은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열었다.


“스컬지 전력이나 늘려주겠지.”


순간 탁자가 나뒹굴었다. 레온이 탁자를 엎고 리온의 멱살을 잡은 것이다.


“내가… 내가 누구 때문에 노스렌드에 가려고 결심한 건데!”


“나 때문이란 거냐?”


레온은 이를 악물었다. 


“형이 있던 부대가 전멸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 심정을 알기나 해? 다시는 형을 못 보게 되었다는 절망감을 알긴 하냐고!”


“그래서, 겨우 복수심 같은 이유로 노스렌드에 가려고?”


“아니! 한동안은 슬펐지만, 그래도 나름 잘 극복했어. 어차피 아제로스에서 전쟁에 참가한 이상 그건 늘 일어나는 일이니까. 하지만 성기사로서 누군가를 돕는 일 중 가장 시급하고 가치 있는 일이 리치 왕과 스컬지를 물리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야. 아제로스 주민들을 위해서, 그리고 죽은 형을 위해서!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형이 이런 모습으로 돌아와서는 한다는 말이 뭐? 내가 짐덩이라고?”


레온은 잡았던 멱살을 거칠게 놓았다. 


“넌, 내 형이 아니야. 형일 리가 없어!”


레온은 자리를 박차고 그대로 나가버렸다. 리온은 레온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일어났다. 

 

 

 

 


레온은 분이 풀리지 않아 한동안 씩씩거리며 오그리마 거리를 걸었다. 방금 만났던 사람은 절대 자신의 형이 아니었다.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았던 형. 스컬지의 침공으로 실버문이 파괴되던 날 부모님을 잃었지만, 형은 희망을 잃지 않고 든든한 모습으로 언제나 곁을 지켜주었었다. 


어렸을 적을 생각하자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기억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꾸 떠올랐다. 성기사 수업을 받던 성실한 수련생이었던 형, 레온에게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달려와 주었던 믿음직한 형,

그리고 정식 성기사가 된 늠름했던 형의 모습…. 


하지만 아까 만났던 인물에게서는 예전 형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따뜻한 미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데다가, 무엇보다 형은 저렇게 차가운 말로 남에게 상처입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스컬지가… 우리 형 흉내를 내는 걸지도….’


여기까지 생각이 들자, 눈물이 왈칵 났다. 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감정이 다시 한 번 덮쳐왔다.

형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는 형을 만날 수 없다는 생각에 슬퍼하고 절망했었던 기분.

오그리마로 차원문을 타기 전부터 형이 예전과는 달라져 있을 거라는 것은 이미 알고 각오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마주한 현실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무작정 거리를 걷던 레온은 걸음을 멈췄다. 아까 있었던 일은 그냥 없던 일로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노스렌드 원정일 때문에 오그리마에는 올 예정이었으니, 일정이 앞당겨진 셈 치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먹은 레온은 길드 사무실로 향했다.

 

 


“레온! 일찍 왔네? 원래는 며칠 뒤에나 올 거 아니었어?”


사무실에서 서류 작업을 하던 여성 트롤이 고개를 들며 인사했다. 책상에는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뭐 그냥….”


“일찍 올 거면 아예 더 일찍 오지. 얼마 전에 구경거리가 있었는데.”


“무슨 일인데?”


“죽음의 기사들이 일부 호드에 합류한 거 알지? 그 때 난리가 아니었어. 대족장한테 편지 전달하겠다고 당당하게 들어오는데, 경비병이고 시민들이고 완전히 패닉 상태였지. 뭐 싸울 의사가 없다고 하니 대놓고 공격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분노한 사람들이 썩은 사과 던지고 침 뱉고 그랬지. 뭐 자기들이 한 짓이 있으니 그거 다 묵묵히 맞고 있더라.”


레온은 잠깐동안, 아까 만났던 리온이 썩은 사과를 맞고 있는 모습을 떠올렸지만, 잘 상상되지는 않았다. 


“나도 그 자식한테 한 방 날려줄 걸.”


“응? 뭐라고?”


레온의 중얼거림에 할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레온의 대답에 할라는 다시 서류로 눈길을 돌렸다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희소식이 있어. 우리 길드에도 죽음의 기사가 들어왔다는 말씀!”


“....난 싫은데.”


레온이 투덜거렸지만 할라는 별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아마 며칠 뒤에 출발하는 노스렌드 원정대에 합류할 것 같으니, 너도 미리 인사해 둬. 이름이 리온….”


“뭐?”


레온이 큰 소리를 내자, 트롤이 깜짝 놀라 쳐다봤다. 레온은 아랑곳않고 책상에 다가가 물었다.


“이름이 리온이라고?”


“어.”


“혹시 나랑 같은 엘프야?”


“맞아. 왜 그래?”


“그 자식 어디 있어?”


“여기 있는데.”


레온이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옆 방을 가리고 있던 천막을 젖혀지며 리온이 나왔다. 뒤를 이어 나온 길드 마스터인 여성 블러드엘프가 찌푸린 얼굴로 레온을 노려봤다.


“레온, 좀 조용할 수 없어? 신입 길드원하고 면담중이었는데 방해받았잖아.”


레온은 세실의 짜증은 아랑곳않고 다가갔다.


“세실 누나, 저 자식 길드에 받아들이면 안 돼요!”


“넌 왜 우리 길드 들어오겠다는 사람한테 함부로 이 자식, 저 자식이래.”


“그럴만 하니까 그렇지. 어쨌든 저 자식은 안 된다고!”


세실은 한숨을 푹 쉬었다. 


“레온, 우리 길드 창단 한 지 얼마 안 된 거 알지? 지금 길드원이 너랑 저기 있는 할라와 할라네 오빠, 그리고 아직 마법학교 졸업도 못한 네 마법사 친구밖에 없는 거 몰라? 이와중에 죽음의 기사가 들어온다고 하면 두 팔 벌려 환영해도 모자랄 판에, 뭐하는 짓이야?”


“하지만…”


“레온!”


세실의 표정이 무시무시하게 변하자, 레온이 움찔했다. 전직 순찰자였던 그는 순찰자를 그만두고 동부왕국과 칼림도어는 물론 아웃랜드까지 모험했던 베테랑이었다. 수명이 긴 엘프의 특성상 겉모습은 레온과 별로 나이 차이가 나 보이진 않았지만, 적어도 100살 이상은  많을 것이다. 


“좋아, 그럼 왜 리온 씨가 우리 길드에 들어오면 안 되는지 나를 논리적으로 설득해봐.”


레온은 우물쭈물했다.


“내가… 싫으니까.”


“아~ 그러니까 네 개인적인 감정에 따라 길드원을 뽑아야한다?”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저 자식, 아니 저 자는 인성이 별로…”


“인성 문제는 내가 판단할 문제고, 일단 면접은 통과야. 그것보다…”


세실은 리온을 힐끗 바라보았다. 리온은 마치 자기 일이 아니란 듯이 길드 사무실을 구경하다 세실의 눈짓에 가까이 왔다.


“리온 씨가 널 노스렌드 원정대에서 빼달라고 하던데..”


“뭐?”


흥분해서 당장이라도 리온에게 달려들려던 레온을 세실이 막았다.


“말 좀 끝까지 들어. 일단 신입 길드원 주제에 그런 권한은 없다고 했어. 그리고 넌 그가 길드에 들어오는 게 맘에 들지 않는 모양이니, 둘이 한 번 붙어보는 건 어때? 신입 길드원 실력 테스트도 할 겸.”


“...좋아.”


리온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고 레온이 대답했다. 그런 레온을 보며 세실은 싱긋 웃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사무실 때려부수지 말고, 밖으로 나가자.”

 

 


“근데, 저 둘은 왜 저러는 거야?”


오그리마 성문 밖으로 나가며 할라가 세실에게 살짝 물었다. 싸움 구경하러 함께 가고는 있지만, 레온이 대체 왜 저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은 채였다.


“뭐 형제끼리 사정이 있나봐.”


“형제라고? 레온이랑 리온 씨가? 하지만 리온 씨는…”


“그럴 수도 있는 거야. 한 번 죽었던 사람이라면…”


“아, 그렇구나. 근데 형제인데 왜 싸우지? 나랑 오빠랑 싸우는 거랑 비슷한 건가?”


“아마 그럴지도?”


세실과 할라가 잡담을 나누는 동안, 레온과 리온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은 채 넓은 벌판에 자리를 잡고 마주 섰다. 레온은 잡아먹을 듯이 리온을 노려보았고, 리온은 여전히 냉랭한 표정으로 레온을 바라보았다. 


선공은 레온이었다. 레온은 리온에게 방패를 날림과 동시에 달려들었다. 리온이 들고있던 대검으로 날아오는 방패를 막자, 깡! 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레온은 다시 돌아오는 방패를 익숙한 솜씨로 붙잡았다. 방패를 막느라 틈이 생겼을 테니, 그 사이를 파고들 참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다리가 무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바닥에 부패한 죽음의 기운이 깔려 있었다. 


‘이런 제길!’ 


레온은 순간적인 판단력을 발휘해, 피하지 않고 그대로 리온 앞으로 달려갔다.. 원거리에서 공격하지 않는 이상 이 바닥을 피할 수 없을 테니, 차라리 그냥 무시하고 붙는 게 낫다는 생각이었다. 상대 역시 죽음의 기사이기 때문에 거리를 벌리지 않을 거라는 계산도 있었다. 


리온과 가까워지자 부정한 오라가 자신을 압박하는 것이 느껴졌다. 레온은 그에 대항하듯 신성한 오라로 몸을 감싸며 땅에 신성한 기운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날아오는 대검을 방패로 막으며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성기사로 수련하며 유령의 땅에서 수많은 언데드들과 싸워봤지만, 죽음의 기사와의 싸움은 그런 언데드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룬이 새겨진 대검을 능숙하게 휘두르며 공격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지만, 가끔씩 소용돌이 치는 기운에 닿기만 해도 생명력을 흡수당하는 역병에 감염되었다. 게다가 대검으로 방어보다는 공격적인 태세를 취했는데, 그 틈을 타서 레온의 공격이 성공해도 아무런 느낌을 느낄 수 없다는 듯이 다시 대검을 휘둘렀다. 마치 방어가 필요없다는 듯한 태도로 퍼붓는 공격을 막아내며 레온은 정말 역겹다는 생각을 했다.


한편 리온의 입장에서도 방패를 든 성기사와 싸우는 것이 쉽지 않았다. 땅에 깔린 신성한 기운 때문에 제대로 공격력을 발휘하기가 힘들었고, 레온이 적절할 때마다 빛의 힘을 끌어내 치는 통에 대마법 보호막이 없을 때마다 얼얼하게 맞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생명력 흡수로 어느 정도 데미지는 회복하고 있었지만, 레온이 자신의 공격을 막아내면서도 틈틈이 방패까지 이용해서 공격해 왔다. 그리고 그것이… 왠지 모르게 즐거웠다.


‘?’


공격을 막으며 틈을 보던 레온이 리온을 보고는 순간 멈칫했다. 리온이 섬뜩하게 웃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보다 더 즐거울 수 없다는 듯이 웃음을 띠고 있었지만, 살아있지 않은 존재의 그런 웃음은 충분히 공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 잠깐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리온의 대검이 레온의 허리를 향해 휘둘러졌다. 


‘아차!’


레온은 자신이 죽는다는 생각과 함께 죽을 수는 없다고 의지가 들었다. 순식간에 레온의 몸에 보호의 축복이 펼쳐지면서 리온의 모든 공격이 무효화되는 방어막이 쳐졌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세실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큰 소리로 박수를 짝짝! 쳤다.


“자, 입단 테스트는 여기서 끝내자! 이러다가 둘이 평생동안 싸우겠어.”


세실의 말에 리온이 먼저  검을 내렸다. 레온도 머뭇거리다가 전투 태세를 풀었다.


“리온의 입단 테스트는 합격이야. 큰 전력이 되겠는걸? 다른 길드원들의 연습상대로도 충분한 것 같고.”


레온이 칫 하고 불만스런 소리를 냈지만 세실은 신경쓰지 않았다.


“그리고 레온도 노스렌드 원정대에서 빠질 이유가 없는 걸? 둘 다 노스렌드 가고 싶으면 같이 가면 되겠네.”


레온은 리온이 항의를 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무심코 리온을 보다 깜짝 놀랐다. 리온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려 있었고, 순간 살아 생전의 형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좋아.”


“아까는 나랑 같이 가기 싫다며?”


“내가 생각이 바뀐 게 불만인가?”


레온은 뭐라고 말해야 할 지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아까의 대련으로 노스렌드에서 실제로 맞닥뜨리게 될 적이 어떤 것인지 실감을 했다. 리온이 자신을 말리려던 진짜 이유가 어렴풋하게 느껴질 것 같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것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리고 리온이 생각이 갑자기 바뀐 것에도 의문이 들었다.


“나랑 잠깐 얘기 좀 해.”


레온의 말에 리온이 막 옮기려던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할 말 있으면 해보란 듯이 레온을 바라보았다. 둘이 이야기하려는 것을 본 세실은 할라와 함께 조금 떨어져서 기다리기로 했다.


“나보고 노스렌드에 가지 말라고 했던 이유, 날 걱정해서 그런 거야?”


“...글쎄.”


리온은 무표정하게 애매한 대답을 했다. 레온이 노스렌드에 간다는 게 그냥 기분 나빠서 그랬던 건데, 그게 걱정이었나? 리온은 자신의 감정에 확신을 할 수 없었다.


“그럼, 왜 지금은 같이 가겠다는 거야?”


그 말에 리온은 잠깐동안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씨익 하고 웃었다. 생전의 형과 닮았으면서도 사악해 보이는 그 웃음을 보니 레온은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 


“네녀석을 괴롭히는 게 상당히 즐겁더군.”


예상했던 대답이 아니라 벙쪄있는 레온을 뒤로 하고 리온은 발걸음을 옮겼다. 죽음의 기사가 되고 난 후, 더이상 느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감정에 스스로도 놀라는 중이었다. 죽음의 기사들이 느끼는 파괴 욕구의 충족과는 다른 즐거움. 이것이 진짜 가학성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생각보다 더 성장한 동생 때문인지 깊이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리온은 감정 같은 걸 분석하고 따지기 보다는 그냥 현재 자신이 해야할 일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레온이 노스렌드에 가는 걸 말릴 수는 수는 없어도, 함께 싸우는 건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레온을 계속해서 괴롭힐 수 있는 것은 물론, 자신보다 레온이 먼저 죽는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당분간은 이것만을 생각하기로 했다.


“자, 잠깐. 형, 기다려! 야! 리온 선라이트!”


다급하게 부르는 레온의 외침을 무시하며 걷던 리온은 이름을 부르자 방향을 바꿔 레온에게 다가왔다.


“한 가지 알려줄 게 있는데, 난 리온 선라이트가 아냐.”


“뭐?”


“리온 언홀리블러드. 이게 내 이름이다. 그러니 더이상 날 형으로 생각할 필요 없어.”


리온은 다시 몸을 돌렸다. 더이상 리온을 붙잡지 못하고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레온에게 세실이 다가왔다.


“원래 한 번 죽었던 사람들이 이름을 바꾸는 건 흔한 일이야. 포세이큰도 대부분 그런 걸.”


“......”


“레온, 내가 순찰자를 그만두고 제일 먼저 한 일이 뭔지 알아? 언더시티에 갔었어. 그곳에서 스컬지가 되었다가 지배에서 풀려난 로데론 주민들과, 그리고 순찰자 동료들, 지금은 어둠 순찰자라고 불리는 이들을 만났지.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실바나스 님도. 당연한 얘기겠지만, 모두 다 생전과는 달라져 있었고.”


“......”


“우린 아직 ‘죽음’을 겪어보지 못했으니까, 아마 그들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건 불가능할 거야.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들에게 생전의 모습과 다르다고 화내거나, 예전 모습으로 돌아오라고 다그치는 게 아닌, 그냥 그 모습 그대로 인정해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아직, 어떻게 대해야 할 지 잘 모르겠어요.:


“너무 부담 갖지는 말고. 그냥 같이 노스렌드 원정대에 참여할 새로운 동료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레온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형은 형이에요. 겉모습도, 이름도, 그리고 성격까지 변했지만… 그래도 형이라고 생각할 거에요.”


‘그리고, 절대 이번엔 형을 혼자 죽게 하진 않겠어. 이젠 내가 형을 지켜줄 거야.’


속으로 굳은 결의를 다짐하는 레온의 어깨를 세실이 툭툭 토닥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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